가. 남용되는 개념

한의원에서 어혈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이 너무 넓게 쓰인다는 인상을 받으신 분도 있을 겁니다.

앞서 不通則痛을 다루면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명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어혈도 같은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순서는 같습니다. 이 개념이 원래 무엇을 보고 만들어졌는지, 어디까지가 그 사정거리인지를 재 봅니다.

나. 원래 무엇을 보고 한 말인가

어혈은 추상적 개념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넘어져 부딪힌 자리가 검푸르게 변하는 것. 그 자리가 오래 아픈 것. 여성의 월경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나오는 것. 혀 아래 정맥이 굵고 검게 도드라지는 것. 피부에 실핏줄이 얽혀 보이는 것.

이런 관찰이 먼저 있었고, 그것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어혈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통증의 성질이 더해집니다. 찌르는 듯하고, 자리가 고정되어 있고, 밤에 심해지고, 누르면 더 아픕니다. 은은하게 여기저기 아픈 통증과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이 관찰들은 지금 봐도 정확합니다. 문제는 관찰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그 시대의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다. 현대 개념으로 나누면 셋입니다

어혈이라 불린 현상은 오늘날 최소한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조직 손상 후의 출혈과 그 흡수 과정입니다. 멍이 생기고 색이 변해 가는 것이 여기 해당합니다. 적혈구가 파괴되고 헤모글로빈이 분해되며 색이 자주색에서 녹색, 노란색으로 바뀝니다. 고전이 어혈이 흩어진다고 서술한 과정이 이것입니다.

둘째, 미세순환의 장애입니다. 모세혈관 수준에서 흐름이 느려지고 적혈구가 뭉치며 조직으로의 산소 공급이 떨어지는 상태입니다. 만성 통증 부위에서 관찰되는 변화와 겹칩니다.

셋째, 응고와 혈전입니다. 실제로 피가 굳어 혈관을 막는 상태입니다.

이 세 가지는 기전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고전에서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라. 확장이 지나친 지점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세 번째, 즉 실제 혈전과 관련된 상태에 어혈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합니다. 다리가 갑자기 붓고 아프고 뜨거운 상태를 어혈로 보고 순환을 개선하려 접근하면 시간을 놓칩니다. 이것은 즉시 확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 미세순환 장애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합니다. 만성 통증에서 순환 저하가 관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통증 때문에 움직이지 않아 순환이 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앞서 다룬 중추 감작 상태에서는 순환을 개선해도 통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모두 같은 접근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마. 고장이 확인해 주는 자리

두 체계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지는 실패 양상에서 확인합니다. 여기서 가장 선명한 사례는 외상 후의 경과입니다.

교통사고 뒤에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는데 통증이 오래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전은 이것을 충격으로 어혈이 생겨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서술했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미세한 조직 손상과 그에 따른 국소 출혈, 염증 반응, 그리고 근육의 방어성 긴장이 겹친 상태입니다. 영상 검사에서 보이지 않는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두 체계 모두 같은 예측을 합니다. 검사에서 안 보인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며, 초기에 다루면 경과가 낫다는 예측입니다. 이 지점에서 관찰이 일치합니다.

또 하나. 여성의 월경통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나올 때 통증이 심하고, 덩어리가 나오고 나면 통증이 덜해진다는 관찰이 있습니다. 자궁 내막이 배출되는 과정에서 자궁이 수축하며 생기는 통증이라는 현대적 이해와 겹치는 부분입니다.

바. 남는 질문

어혈과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담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피가 뭉친 것이고 하나는 물이 고인 것입니다.

혈관 안의 흐름과 조직 사이에 고인 체액을 다른 구획으로 다루는 현대의 이해와 이 구분이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다루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멍이 잘 드는데 어혈이 많은 건가요

멍이 쉽게 드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혈소판이나 응고 기능의 문제, 복용 중인 항혈전제, 나이에 따른 피부와 혈관의 변화가 관여합니다. 이유 없이 멍이 늘었다면 검사를 확인해 보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어혈을 푸는 치료를 받으면 순환이 좋아지나요

통증의 성격이 자통이고 자리가 고정되어 있으며 외상이나 정체가 배경에 있는 경우에는 방향이 맞습니다. 다만 모든 통증이 그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므로 성격을 먼저 나누는 일이 앞섭니다.

참고문헌

  1. 黃帝內經 素問 — 혈맥의 응체와 통증에 관한 서술
  2. 東醫寶鑑 內景篇 血 — 어혈의 증후와 감별에 관한 조문
  3. Guyton and Hall 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 Microcirculation and Hemostasis — 미세순환과 지혈 응고 기전
*본 내용은 의료광고 심의 기준을 준수하며 개인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효과 차이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한의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