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밥으로 정을 채울 수 있다면 왜 약이 필요했을까
《동의보감》의 정(精)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의문이 생깁니다.
정이 부족하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동의보감》은 이에 대해 “정은 곡식에서 생긴다(精生於穀)”고 했고, 이어 “정이 부족하면 맛으로 보한다(精不足者 補之以味)”고 기록했습니다. 진하고 자극적인 맛보다는 담담한 곡식의 맛을 강조하면서, 오곡을 정을 기르는 중요한 바탕으로 보았습니다. ([위키문헌][1])
그렇다면 여기서 조금 이상해집니다.
밥을 잘 먹으면 정을 보충할 수 있는데 왜 다시 육미지황원 같은 보정 처방이 필요했을까요? 정을 채운다는 목적이 같다면 음식과 약의 차이는 단지 어느 쪽이 더 강하냐의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두 가지는 정을 채우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오곡으로 정을 채운다는 것은 정을 만들어낼 물질적인 재료를 공급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반면 육미지황원으로 정을 보한다는 것은 정이라는 어떤 물질을 약 안에 담아 직접 채워 넣는다기보다, 들어온 재료를 이용해 정을 만들고 보존하는 몸의 기능이 제대로 움직이도록 돕는 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재료를 넣는 것과 그 재료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 “정은 곡식에서 생긴다”는 말은 생각보다 물질적이다
한의학의 정을 설명할 때 흔히 ‘생명에너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의 중요한 성격 하나를 놓치게 됩니다.
정에는 분명히 물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음식으로 들어온 탄수화물은 포도당 등의 형태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지방은 지방산을 비롯한 여러 성분으로 소화·흡수됩니다. 비타민과 무기질 역시 외부에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온 물질은 에너지를 만드는 데 쓰이고, 세포막과 단백질을 만들며, 효소와 여러 생리활성 물질의 재료가 됩니다. 성장과 조직의 재생, 생식 기능 역시 이 물질적 공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대 생리학 역시 인체의 항상성이 외부에서 받아들인 영양 기질을 대사하고 분배하는 과정 위에서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Elsevier Shop][2])
이렇게 보면 “정생어곡”이라는 짧은 문장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정이 어디선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을 구성하고 다시 채울 재료는 결국 먹는 것에서 옵니다.
그래서 오곡으로 정을 기른다는 말을 현대적으로 풀 때 저는 먼저 ‘영양물질의 공급’을 떠올립니다. 정을 포도당이나 단백질 하나와 동일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의학의 정은 성장, 생식, 발육, 노화, 골수 등 훨씬 넓은 범위를 설명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넓은 기능조차 물질적 토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곡은 바로 그 토대를 공급합니다.
다. 재료가 충분해도 공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런데 사람의 몸은 창고가 아닙니다.
음식을 많이 넣는다고 그만큼 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구조라면 이야기는 매우 간단했을 것입니다.
먹은 단백질이 그대로 근육이 되는 것이 아니듯, 들어온 영양물질은 소화되고 흡수된 뒤 다시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필요한 곳으로 운반되어야 하고, 세포가 받아들여야 하며, 필요에 따라 합성하거나 저장하고 다시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장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원료 창고에 재료가 가득 차 있어도 컨베이어벨트가 멈추고, 생산기계의 속도가 맞지 않으며, 냉각과 배출 장치에 문제가 있다면 완제품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몸에서도 ‘얼마나 들어왔는가’와 ‘들어온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현대 생리학에서 이 과정은 어느 하나의 장기가 담당하지 않습니다. 신경계와 내분비계가 신호를 주고받고, 간과 근육과 지방조직이 영양물질을 처리하며, 신장은 수분과 전해질 및 체액의 조성을 조절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기능들이 일정한 값으로 멈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장 기능에는 하루 동안 변화하는 생체 리듬이 존재하며, 신장의 여과·전해질 처리와 같은 여러 기능에 일주기 조절이 관여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PubMed][3])
부신의 호르몬 분비에도 뚜렷한 시간적 리듬이 있습니다. 방광 역시 가만히 소변을 담아두는 주머니가 아니라 저장기와 배출기를 번갈아가며, 이 과정에는 중추신경계와 교감·부교감 신경의 정교한 조절이 관여합니다. ([PubMed][4])
따라서 생명은 재료의 양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고, 필요한 것을 남기고, 필요 없는 것을 내보내며, 저장과 사용을 번갈아 하는 조절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라. 육미지황원은 ‘농축된 정’을 먹는 처방이 아니다
여기서 육미지황원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육미지황원에는 숙지황, 산수유, 산약, 복령, 목단피, 택사가 함께 들어갑니다.
이 처방을 ‘밥보다 강력하게 정을 채워주는 영양제’처럼 이해하면 오히려 의미가 흐려집니다. 육미지황원이 정을 보한다는 것은 음식보다 열량이나 단백질을 훨씬 많이 공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의학에서는 정을 저장하는 기능을 신(腎)과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신을 현대 해부학의 콩팥 하나와 동일하게 보면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한의학의 신은 생식과 성장, 노화, 골수, 수액대사와 배뇨 등을 하나의 기능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장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육미지황원의 보정 작용을 이해할 때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곡이 재료를 넣어주는 것이라면, 육미지황원 같은 보신·보정 처방은 그 재료를 받아 저장하고 사용하며 유지하는 ‘정 생성 시스템’의 상태를 살피는 처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신장과 부신, 방광과 생식계 등 하복부의 여러 기능이 나타내는 생리적 율동은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율동’은 모든 장기가 함께 박자를 맞춰 수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장의 하루 주기, 부신 호르몬의 시간에 따른 변화, 방광의 저장과 배출, 생식계의 호르몬 신호처럼 몸의 기능이 시간과 신경·호르몬의 조절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에 ‘신장-부신-방광을 하나로 묶은 신계 율동축’이라는 공식적인 생리학적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의 기능을 현대의 여러 생리현상과 비교해 이해하기 위한 해석입니다.
육미지황원에 대한 현대 연구에서도 신경·내분비·면역 조절과 관련된 다양한 작용 가능성이 연구되어 왔지만, 여러 연구가 실험적·전임상적 수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미지황원이 특정 장기나 특정 호르몬 축을 직접 ‘재가동한다’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여러 생리 조절 과정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연구되고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현재 근거에 맞습니다. ([PubMed][5])
마. 정을 보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질문이 들어 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정을 보하려면 밥을 먹어야 할까요, 육미지황원을 먹어야 할까요?
사실 이 둘은 같은 질문에 대한 경쟁적인 답이 아닙니다.
오곡이 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정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몸을 이루고 유지하는 물질은 밖에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정은 곡식에서 생깁니다.
육미지황원 같은 보정 처방이 바라보는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들어온 재료를 이용해 정을 만들고 저장하고 유지하는 기능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차이를 놓치면 ‘보한다’는 말을 무조건 무엇인가를 더 집어넣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재료가 모자라면 재료를 채워야 합니다. 반대로 재료가 들어오고 있는데도 그것을 처리하고 저장하고 사용하는 생리적 조건에 문제가 있다면 더 많이 먹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곡과 육미지황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오곡은 정을 이루는 재료를 공급합니다.
육미지황원은 이미 들어온 재료가 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계의 기능적 상태를 조절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장에 비유하면 오곡은 원료입니다. 육미지황원은 완제품을 한 상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원료를 제품으로 만드는 공장의 작동 상태를 살피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동의보감》의 “정은 곡식에서 생긴다”는 말과 후대의 보신·보정 처방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물질적 기반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기반을 몸이 어떻게 만들어내고 지켜가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한의학의 정은 막연한 ‘에너지’보다 훨씬 구체적인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정은 몸을 이루는 물질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동시에 그 물질을 끊임없이 만들고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생명 활동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동의보감》에서 “정은 곡식에서 생긴다”는 것은 영양소를 말하는 것인가요?
현대적으로 비교하면 음식에서 얻는 포도당, 아미노산, 지방산, 비타민, 무기질 등 생명활동의 물질적 재료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의학의 정 자체를 특정 영양소 하나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육미지황원은 정을 직접 보충하는 약인가요?
정이라는 특정 물질이 들어 있어 그것을 직접 채운다고 보기보다는, 전통적으로 신음과 신정의 허손으로 판단되는 상태에서 신계의 기능적 균형을 조절하기 위해 구성된 처방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한의학의 신은 신장·부신·방광을 모두 뜻하나요?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의 신은 현대 해부학적 장기 하나를 뜻하기보다 생식, 성장, 노화, 골수, 수액대사와 배뇨 등을 포괄하는 전통의학적 기능 개념입니다. 신장·부신·방광 등의 현대 생리 기능은 이를 이해할 때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지 서로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참고문헌
- 23. 참고문헌
- 《동의보감》 내경편 권1 정·보정이미: [ https://zh.wikisource.org/wiki/%E6%9D%B1%E9%86%AB%E5%AF%B6%E9%91%92/%E5%85%A7%E6%99%AF%E7%AF%87%E4%B8%80](https://zh.wikisource.org/wiki/%E6%9D%B1%E9%86%AB%E5%AF%B6%E9%91%92/%E5%85%A7%E6%99%AF%E7%AF%87%E4%B8%80)
- 《동의보감》 ‘보정이미’ 원문·번역 자료: [ https://lampcook.com/food/food_medi_view.php?idx_no=4665](https://lampcook.com/food/food_medi_view.php?idx_no=4665)
- Hall JE, Hall ME. Guyton and Hall 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 15th Edition. Elsevier: [ https://shop.elsevier.com/books/guyton-and-hall-textbook-of-medical-physiology/hall/978-0-443-11101-3](https://shop.elsevier.com/books/guyton-and-hall-textbook-of-medical-physiology/hall/978-0-443-11101-3)
- Effect of Liuwei Dihuang decoction on the neuroendocrine immunomodulation network. PubMed PMID 26896567: [ https://pubmed.ncbi.nlm.nih.gov/26896567/](https://pubmed.ncbi.nlm.nih.gov/26896567/)
- Circadian clocks of the kidney: function, mechanism, and regulation. PubMed PMID 35575250: [ https://pubmed.ncbi.nlm.nih.gov/35575250/](https://pubmed.ncbi.nlm.nih.gov/35575250/)
- Adrenal clocks and the role of adrenal hormones in the regulation of circadian physiology. PubMed PMID 25367898: [ https://pubmed.ncbi.nlm.nih.gov/25367898/](https://pubmed.ncbi.nlm.nih.gov/25367898/)
- Autonomic nervous control of the urinary bladder. PubMed PMID 23033838: [ https://pubmed.ncbi.nlm.nih.gov/23033838/](https://pubmed.ncbi.nlm.nih.gov/23033838/)